마라톤 민족영웅 손기정 스토리
2012-01-06 오후 4:56:48 관리자 조회 2096
 

1945년 광복 후 손기정 선생(1912~2002)은 묵묵히 마라톤 후진양성에만 매달렸다. 정치 쪽에서 유혹이 많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전국의 꿈나무 20여명을 뽑아 서울 안암동 자신의 집에 밥을 먹여가며 훈련을 시켰다. 훈련은 매일 새벽 장독대의 태극기 아래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수시로 김구 선생, 이범석 장군 등을 모셔다가 민족정신을 북돋는 강연을 듣기도 했다.

  제자 서윤복(1923~)은 “손 선생님이 우리 합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너도나도 서로 들어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1947년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25분39초의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손 선생이 1935년 11월 도쿄에서 세운 세계최고기록(2시간26분42초)을 제자 서윤복이 경신한 것이다. 이 기록은 1952년 6월 영국의 제임스 피터스에 의해 깨졌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인 스승과 제자가 17년 동안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선 역시 손 선생이 길러낸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최윤칠이 4위, 1956년 맬버른 올림픽에선 이창훈이 4위를 기록했다. 모두 손 선생의 작품이었다.

 손 선생과 황영조는 체격이나 성격에서 닮은꼴이다. 손 선생과 황영조는 가슴이 두터운데다 마라토너로서 이상적인 체격(167cm, 55kg)을 타고 났다. 발목도 가늘고 얼굴도 직사각형 모습이다. 두 사람은 성격도 활달하다. 손 선생은 농담도 잘하고 황영조는 방송 해설을 할 정도로 어디가나 화제를 뿌린다.

 하지만 손 선생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베를린올림픽마라톤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달리는 가하면, 베를린올림픽선수촌에서 새벽에 남몰래 일어나 별도훈련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신발 바닥을 깎아내기도 하고, 가위로 러닝셔츠를 도려내고 팬티를 잘라내기도 했다.

 손선생은 달리고 도 달렸다. 학교에 오갈 때뿐만 아니라 압록강변의 뚝, 모래 벌 등 아무 곳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의 단벌옷은 늘 땀으로 절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는 아들이 달리기보다는 공부에 매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들에게 일부러 잘 벗겨지는 여자고무신을 신게 했다. 하지만 손기정 선생은 여자고무신 위를 새끼줄로 묶어 벗겨지지 않도록 하고 달렸다. 새끼줄에 쓸려서 발목에 피가 배어나오는데도 달리기를 그만두려하지 않았다. 손기정 선생은 “내가 달리기를 하게 된 것은 돈이 한 푼도 안 들기 때문이었어. 만약 스케이트를 살 수만 있었다면 스케이팅선수가 됐을 거야”라고 말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스케이트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안 드는 달리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 선생은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땐 냉수로 배를 채우고 달렸다. 어느 땐 배가 너무 고파 도저히 달릴 수조차 없었던 적도 있었다. 생전에 손 선생은 “난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 당시 밥만 충분히 먹고 달렸다면 기록이 더 좋았을 거야.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거꾸로야. 조금만 배가 부르면 달리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야. 1등 해본 사람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1등을 할 수 있는 법인데…”라며 탄식을 했다.

  손 선생이 태극기를 난생 처음 본 것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바로 직후였다. 당시 두부공장을 하며 베를린에 살던 안중근선생 사촌동생 안봉근이 손 선생과 3위를 차지한 남승룡 선생(1912~2001)을 은밀히 집으로 부른 것이다. 안봉근은 그들을 다짜고짜 서재로 데려가더니 “이것이 태극기다. 우리 조국의 국기다.”라며 벽에 걸린 ‘아름다운 무늬’를 가리켰다. 손 선생은 “그때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며 한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온몸이 감전됐고 우리민족은 저 태극기처럼 면면히 살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1932년 손 선생은 신의주에 있는 동익상회 점원으로 일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압록강변을 달렸다. 그러다 그해 봄 제2회 동아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숙소는 동익상회 주인인 공정규씨의 배려로 마침 그의 저택이 있는 광화문 부근에 잡았다. 공정규씨는 공안과원장과 한글타이프라이터 발명가로 유명한 공병우박사의 부친이다. 당시 대회는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을 출발해 영등포를 돌아오는 14.5마일(약 23.6km) 코스에서 펼쳐졌다.    대회 하루 전, 손 선생은 혼자 코스답사에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마포와 영등포를 잘 구분하지 못해 끝내 반환점이 어디인지 찾지도 못한 채, 밤늦게 간신히 공 박사 댁에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그것이 문제가 됐다. 대회가 열린 3월21일, 손 선생은 삼각지까지 기세 좋게 선두로 달렸다. 그러나 막상 삼각지에 이르자 그곳 여러 갈래 길 중에서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제자리에서 망설이고 있는 사이 뒤따라온 변용환이 앞서나갔다. 도리 없이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손 선생은 영등포 반환점까지 그렇게 변용환선수를 앞세우고 갔다. 변용환 1시간21분54초로 대회 신기록 우승. 손기정 1시간25분25초 준우승. 그러나 손 선생은 그 이듬해 제3회동아마라톤(광화문~청량리~망우리~광화문 15마일)에선 1시간24분03초로 당시 1인자 유해붕을 27초차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손기정은 1912년 8월29(음력)일 한반도의 서북쪽 끝, 옛 만주에 접해 있는 신의주에서 아버지 손인석(1875~1935)과 어머니 김복녀(?~1941) 사이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잡화점을 운영했지만 보잘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머리에 일용 잡화를 이고 행상을 해야만 겨우 먹고 살수 있었다. 어린 손기정도 방과 후에는 참외, 옥수수 행상을 하거나 겨울에는 군밤을 구워 팔며 약죽보통학교 수업료(50전)와 학용품 값을 벌었다. 심지어 손기정이 털실을 사다가 직접 장갑 양말 등을 뜨개질해 팔기도 했다. 한 때 일본에 건너가 날품팔이로 살아보기도 했다. 

  손기정은 1932년 제2회동아마라톤 2위 입상을 계기로 그해 봄 스무 살의 나이에 육상명문 서울의 양정고보(현 양정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 손기정은 그의 타고난 달리기 재능을 마음껏 꽃 피웠다. 양정고보 4학년 때인 1935년 3월 도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26분14초로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더니 곧이어 4월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선 2시간25분14초의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결국 11월 도쿄에서 열렸던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26분42초의 공인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손기정은 “이때는 달렸다하면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며 “그 누구도 겁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기정은 1936년 10월8일 프로펠러기를 타고 금의환향했지만 환영행사는 일체 금지됐다. 조선총독부는 서울여의도비행장 출입구를 봉쇄하고 군중들과의 접촉을 막았다. 또한 양정고보 졸업반이었던 그에게 더 이상 학교에 안가도 졸업을 시켜주겠다며 나가지 말라고 했다. 조선체육회의 ‘손기정 마라톤 제패기념 체육관건립모금운동’도 중지됐다.

  손기정 뒤엔 늘 사복형사가 따라 붙었다. 손기정은 숨이 막혀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손기정은 마침내 ‘우승 같은 것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이제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손기정은 1937년 3월 양정고보 졸업하고 보성전문(普成專門·현 고려대) 상과에 입학(1937년) 했지만 형사들의 감시가 계속되자 1937년 1학년 2학기 때 자퇴를 하고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들어갔다.

 ”난 달릴 때 뒤돌아 본 일이 한번도 없었어. 누가 따라오건 말건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렸지. 또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 때 밥을 맘껏 먹고 달렸다면 더 좋은 기록이 나왔을 거야. 요즘 어린이들이 이런걸 알기나 할까?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손기정은 97년부터 바깥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했다. 왼쪽 다리 동맥 경화증 때문에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100m를 20분이나 걸려서 갈 정도였다. 기자가 찾아가면 “밖에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꼼짝을 못하니…”라며 바깥 세상소식을 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그나저나 마라톤보다 인생마라톤이 훨씬 힘든 것 같아”라며 말년의 외로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손기정은 가정적으로 불행했다. 1939년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평양출신 강복신(姜福信)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1944년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5년 60세의 나이에  타계한 그의 아버지와 194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의 임종도 볼 수 없었다.

 “고향 신의주에 가서 냉면이나 한 그릇 먹어봤으면 원이 없겠어.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은 근처에도 못 간다고. 개장국은 또 어떻고…. 내가 그 힘으로 뛰었어.”

 손기정은 늘 북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었다. 말년의 손기정은 “통일원에 방북신청을 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아무래도 북한 측에서 자신의 고향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 1946년 평안북도체육회 창립 당시 북측은 그에게 끈질기게 참가를 요구했지만 손기정은 이를 뿌리치고 서울로 탈출해버렸다. 아마 이것이 괘씸죄에 걸렸을 것이다. 손기정은 “1936년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도 그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손기정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땅을 끝내 밟아보지 못하고  2002년 11월15일 0시40분 서울삼성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90세. 그의 유해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딸 문영(文英·1940~)과 아들 정인(正寅·1943~) 1남1녀. 정인씨는 일본 한국인 단체인 재일거류민단에서 일하고 있다. 

 손 선생은 말년에 바깥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했다. 왼쪽 다리 동맥 경화증 때문에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100m를 20분이나 걸려서 갈 정도였다. “밖에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꼼짝을 못하니…”라며 “그나저나 마라톤인생보다 인생마라톤이 훨씬 힘든 것 같구먼”이라고 쓸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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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슈투트가르트 세계육상대회 여자 100m 결선에서 미국의 게일 디버스와 자메이카의 멀린 오티는 1천분의 1초 차이로 1, 2위가 결정돼 세계 육상 트랙경기에서 가장 근소한 차이로 승부가 가려진 예로 알려져 있다. 2009 베를린 세계육상대회 남자 110m 허들에서도 바베이도스의 라이언 브레스웨이트가 2명의 미국 선수보다 1천분의 1초 단위에서 앞서서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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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반, 창, 포환, 해머를 던지는 4대 투척경기는 원시시대의 수렵 생활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투척경기는 고대 부족 간 전쟁에 대비한 훈련과정에서 스포츠로 발전했다. 전투능력과 관련된 중요한 기술이었던 창던지기와 원반던지기는 제18회 고대올림픽(기원전 708년)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5종 경기에 처음으로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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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격조건
과연 세계적인 육상선수는 타고나는 것일까? 길러지는 것일까? 육상선수의 유전적 능력에 관해서 논란이 많지만 무엇보다 천부적인 능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베이징올림픽과 2009 베를린선수권대회에서 우사인 볼트를 비롯한 자메이카 선수들이 육상 단거리 종목을 석권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유전적인 특성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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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육상
고대 올림픽에서 여자는 경기에 나갈 수 없었고, 경기 관람도 제한받았다. 여자선수들은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부터 테니스 등 일부 종목에서 등장했으나 육상경기에는 오랫동안 출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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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기원과 코스
기원전 490년 그리스의 마라톤 근처에서 치러진 페르시아와의 치열한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아테네까지 달려온 후 숨진 병사 필리피데스(Philippides)의 영웅적 전설은 1896년 제1회 올림픽에서 아테네의 마라톤교(橋)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이어지는 36.75km의 달리기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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